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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축구의 전설, 크루이프 턴을 마감하다

아름다운 축구를 시도했던 요한 크루이프
기자명 : 김성화 기… 입력시간 : 2016-04-08 (금)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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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세계 최고의 팀이라고 하면 리오넬 메시의 FC바르셀로나라고 할 수 있다. 바르셀로나는 메시를 중심으로 MSN라인(메시, 루이스 수아레즈, 네이마르)이 팀을 이끌고 있지만, 그 바탕에는 점유율을 중심으로 상대의 공격기회를 원천 차단하는 전술이 밑바탕이다. 
70년대 세계 축구에서 독보적이던 한 인물은 점유율을 바탕으로 하는 현대축구의 기반을 닦았다. 뛰어난 기량으로 선수 시설에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른 것은 물론이거니와, 감독으로서도 단순히 골만 노리는 축구를 벗어나, 과정을 중시하는 ‘아름다운 축구’를 추구했다. 그는 ‘오렌지’ 군단의 전설 요한 크루이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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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선수시절,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친 월드컵
크루이프가 선수생활을 시작한 것은 모국인 네덜란드의 명문 아약스(AFC AJAX)였고, 아약스는 크루이프가 아약스 생활 이후 많은 시기를 외국에서 보냈음에도 다시 돌아와야 할 곳이었다. 
10살의 나이에 아약스에 입단한 크루이프는 지금도 유소년을 키우는데 일가견이 있는 아약스이 시스템 하에서 실력을 키웠고, 1964년 시즌부터 성인팀에 데뷔하게 됐다. 크라이프는 프로 데뷔 2년차 해인 1965-1966 시즌부터 진가를 발휘하였는데, 10월 24일 AFC DWS전에서 2골을 넣은 이후로 주전으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 시즌에 그는 23경기에서 25골을 넣는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고, 당해 팀은 리그 우승을 이루었다. 
다음 시즌 아약스는 다시 리그 우승을 하였고, 리그컵 격인 KNVB컵을 우승함으로써 더블을 이루었다. 크라이프는 이 시즌에 무려 33골을 넣어 득점왕이 되었다. 1967-1968 시즌은 크루이프의 실력을 상으로 증명 받은 첫 해였다. 이 시즌 역시 아약스가 우승하였고, 크라이프는 ‘올해의 네덜란드 축구 선수’에 뽑혔다. 크루이프의 성장과 함께 아약스의 도약도 이뤄졌고, 1969년 5월 28일 유러피언컵 결승에도 진출했으나, 지아니 리베라가 버티는 AC밀란에게 4:1로 패하고 말았다.
1969-1970 시즌 아약스는 다시 더블을 이루었다. 그러나 1970~71 시즌 초반, 크라이프는 부상으로 오랜 시간 동안 결장했다. 그리고 크루이프는 10월 30일 다시 경기를 뛰었는데, 이때의 등번호를 9번이 아닌 14번으로 변경하며 크루이프를 상징하는 번호를 달았다. 
아약스의 전성기는 14번의 크루이프와 함께 찾아왔다. 아약스는 1971-1973 시즌 동안 유러피언 컵을 연달아 우승하며 유럽 최강의 팀으로 거듭났다. 1972년 크루이프는 국내리그인 에레데비지에, KNVB컵, 유러피언 컵의 트레블에 UEFA슈퍼컵과 인터컨티넨털컵 우승까지 더해 아약스의 5관왕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 영광의 시기는 크루이프와 아약스의 결별로 이어졌고, 크루이프가 이적한 팀은 향후 오랜 인연을 이어갈 FC바르셀로나였다. 당시 이적료는 약 200만 달러로, 당시로서는 그 액수가 엄청나서 스페인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하기도 했다. 크루이프는 10년의 기간 동안 아약스 성인팀에서 뛰면서 240경기 출장, 190골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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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크루이프의 기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크루이프는 이적한 바로 첫 해에 우승을 맛보았고, 덕분에 팀은 1960년 이후 첫 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 해 크루이프는 적응기간 없이 16골의 득점을 올렸고, 동시에 발롱도르까지 수상하며 세계 최고 선수임을 입증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생활은 성공적이었다. 1973년과 1974년에 다시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꾸준한 기량을 선보였고, 1979년 미국 무대로 떠날 때까지 5년 동안 바르셀로나에서 남긴 성적은 143경기 48골. 리그 우승 1회, 코파 델 레이 1회의 기록을 남겼다. 크루이프는 자신의 아들에게 카탈루냐 이름인 요르디(Jordi)란 이름을 붙여줌으로서 바르셀로나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선수 생활 말년은 조금 씁쓸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은퇴를 선언한 크루이프는 사기에 휘말리며 재산을 잃었고, 이로 인해 197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아즈텍스에서 현역으로 복귀했다. 그 해에 북미 축구 리그 MVP를 수상한 크루이프는 한 시즌 뒤 워싱턴 디플로매츠로 이적했고, 1981년 레반테 UD로 떠났다. 그리고 크루이프는 곧바로 아약스로 돌아와 2번의 우승을 더 경험했고, 36세가 되던 해 페예노르트로 이적한 시즌을 마지막으로 선수로서의 길을 마치게 됐다. 
클럽 선수로서 화려했지만, 국가대표로서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1974년 네덜란드는 크루이프를 축으로 한 ‘토털 사커’를 내세워 월드컵 정상을 노렸다. 당시 상대는 홈팀 서독이었다. 조별 예선부터 무난한 승리를 거두고 있던 네덜란드였지만, 상대는 ‘축구황제’ 프란츠 베켄바워와 ‘폭격기’ 게르트 뮐러가 버티고 있었다. 이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는데, 1974년 당시 발롱도르를 수상했지만, 이를 포기하면서라도 월드컵 우승을 잡고 싶었을 기회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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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축구를 정립하다
크루이프가 축구계에 미친 영향력은 선수보다는 오히려 감독으로서 더 컸다. 크루이프가 말한 "내 팀에서 골키퍼는 첫 번째 공격수이고, 스트라이커는 첫 번째 수비수"는 현대 축구팀이 기본으로 하는 원칙이다. 
크루이프가 보여준 토털 사커의 원형은 네덜란드가 아닌 잉글랜드로 보고 있다. 잭 레이놀즈 감독은 전체 공격, 전체 수비를 시도했으며, 빅 버킹검감독은 점유 축구의 신봉자로 패스&무브를 강조했다. 이들 아래서 축구를 경험했던 리누스 미헬스 감독은 아약스에서 토털 사커를 실현하고자 했고, 크루이프는 네덜란드 토털 사커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토털 사커는 비단 네덜란드만의 움직임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마슬로프는 압박과 4-4-2를 이용해 토털 풋볼로 이어지는 여러 개념들을 앞서 선보였으며, 독일의 공격적인 수비수 프란츠 베켄바워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도 카테나치오를 개량해 스위퍼를 리베로 개념으로 운용하기 시작했고, 1970년 브라질 대표팀은 오늘날도 역대 최강팀 칭호를 듣는 유기적인 미드필더 진을 구축했다.
크루이프는 은퇴와 동시에 아약스 유소년팀을 맡으며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아약스 유소년 출신으로는 로날드 데 부어, 프랑크 데 부어,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시도로프 등이 있다. 1985-1986시즌 아약스의 정식 감독이 된 크루이프는 그 시즌 KNVB컵을 우승했고, 다음 시즌에도 KNVB컵 2연패를 달성했다. 동시에 UEFA 컵위너스 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1988-1989시즌 크루이프는 바르셀로나로 옮겼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크루이프는 미카엘 라우드럽과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로날드 쿠만, 호마리우, 게오르게 하지 등 바르셀로나의 전설 등의 수장으로서 팀을 이끌었다. 1990-1991시즌을 시작으로 프리메라리가 4연속 우승의 신화를 기록했고, 1991-1992시즌에는 유러피언 컵을 차지하기도 했다. 크루이프 재임 기간 동안 바르셀로나가 들어 올린 컵만 11개이다. 현재 축구계에서 가장 유능한 감독으로 여겨지는 펩 과르디올라 감독도 유소년 팀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시절, 그의 재능을 보고 크루이프 감독이 1군으로 승격시키면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크루이프가 강조한 축구는 정확한 패스를 통한 볼 점유율로, 현대 축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크루이프는 "공은 하나뿐이다. 그러니 공을 가져야 한다. 공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며 점유율을 높이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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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의 바르셀로나를 보더라도, 이를 완성시키는 것은 선수들의 개인 기량이 우선이다. 크루이프는 "축구를 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간단하게 축구를 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크루이프는 그러나 결국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량이 아니었다. 
“축구는 머리로 하는 것이다. 다리는 도울 뿐이다. 내가 나머지 사람들보다 먼저 뛰기 시작하면 내가 빠른 것처럼 보인다. 기술이란 저글링을 1000개씩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누구나 연습하면 할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서커스단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은 단 한 번의 터치로 패스를 하는 것이다. 적절한 스피드로 당신의 동료가 받기 좋은 곳으로 보내는 것이 기술이다.”
크루이프는 2010남아공 월드컵에서 네덜란드가 32년 만에 결승에 올라 보여준 경기력에 대해 끔직하다며 가혹한 평가를 내렸다. 거친 경기로 일관한 대표팀에 대해 크루이프는 “슬프게도 그들은 더러운 경기를 했다. 추하고, 야비하고, 거칠고, 폐쇄적인, 눈 뜨고 보기 힘든 스타일의 축구를 했다. 이런 축구로 이겼다면 그나마 괜찮다. 근데 졌다."고 평했다. 
크루이프는 보기에도 매력적인 축구를 선호했다. 그런 태도는 크루이프가 이탈리아 축구를 평한 내용에서도 알 수 있다. “그들이 얻은 결과에 대해 '축구로 승리한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가 경기로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팀을 지게 만들 수는 있다.” 물론 반대 생각을 가진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주제 무리뉴 감독은 자신의 축구를 비판하던 크루이프에게 “아직도 과거 속에 사는 크루이프에게서는 전혀 배울 게 없다. 다만 어떻게 하면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0-4로 질 수 있는지 가르쳐달라”며 맞대응하기도 했다. 
크라위프의 대표적인 독설은 2001년 UEFA챔피언스리그 우승팀 바이에른뮌헨과 2001년 UEFA컵 우승팀 리버풀을 향한 것이다. "리버풀은 바이에른뮌헨과 비슷하다. 명성과 이름값만 이다. 축구적으로 보자면 두 끔찍한 팀을 봤다. 내 생각에 같이 세 번의 패스로 연결하지 못하는 팀은 끔찍하다.“
요즘 뛰어난 드리블러라면 기본 소양으로 갖추고 있는 발뒤꿈치를 이용한 기술, 슛이나 패스를 할 듯 하다가 발뒤꿈치로 공을 멈추고 수비수가 수비동작에 들어갔을 때 재빨리 치고가는 기술은 크루이프 턴이라고 하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크루이프가 처음 개발한 개인기다. 간혹 보이는 페널티 킥 상황에서 패스도 크루이프가 최초다.
기술적인 축구의 내적인 면만이 크루이프가 남긴 유산은 아니다. 크루이프는 1995-1996시즌 리그 우승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바르셀로나 감독 지휘봉을 내려놓기 이전까지, 아약스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바르셀로나 유스 시스템을 업그레이드 시켜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바르셀로나로 이어졌다. 이런 유스 시스템은 각 프로팀들이 필수적으로 구현해야할 하나의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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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이프의 최대 라이벌이라고 하면 단연코 베켄바워를 꼽을 수 있다. 포지션도 공격수와 수비수이지만, 둘 다 동시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점에서 라이벌로 꼽을 만하다. 
기록적으로도 두 선수는 대등했다. 크루이프의 아약스가 1970-1973 시즌 3연속 유러피언 컵에서 우승을 했고, 그 뒤 베켄바워의 바이에른 뮌헨이 1973-1976 3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크루이프가 1971, 1973, 1974 3회발롱수상했고, 베켄바워는 1972년, 1976년 2회 발롱수상했다.
베켄바워 이전의 뮌헨은 그리 명문 팀은 아니었다. 베켄바워는 1967년 구단 역사상 첫 유로피언 컵 우승을 이뤘고, 1969년에는 37년 만에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뤄냈다. 이후 클럽에서 수많은 트로피를 들었고, 1972년 유럽선수권 우승과 1976년 유로피언 컵 3연패의 공로를 인정받아 두 차례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1972년은 그의 동료 게르트 뮐러가 그 유명한 한 해 85골을 기록한 해였지만 발롱도르는 베켄바워의 차지였다. 리베로의 개념을 최초로 경기장위에서 풀어낸 베켄바워인 만큼 축구에 있어서 그의 다재다능한 기량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감독으로서의 성과도 크루이프와 베켄바워는 비교할 만하다. 
베켄바워는 선수 때의 리더십을 그대로 이어서 지도자로도 성공했다. 은퇴 직후 서독의 감독을 맡아 1990년 월드컵을 들어 올리면서 주장과 감독으로 월드컵을 들어 올린 최초의 선수가 됐다. 이후 프랑스의 마르세유를 거쳐 친정 팀 바이에른의 감독도 2차례 맡았고, 이 기간 4년 만에 분데스리가 우승과 UEFA컵 우승을 이뤄냈다. 
베켄바워는 희대의 라이벌을 떠나보내며 "크루이프는 내게 좋은 친구 뿐 아니라 형제 같은 존재였다"는 말과 함께 트위터에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게재했다.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같은 시기를 함께했던 두 사람이었기에 크루이프를 떠나보내는 베켄바워의 마음은 남다를 것이다. 

김종수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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