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의 도시를 사랑했던 코비 브라이언트

농구에 대한 열정을 뒤로하는 애증의 NBA 스타

기자명: 편집부   날짜: 2016-04-15 (금) 11:38 3년전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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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종료 2분여를 남겨두고 10점 차. 드라이브 인에 이은 파울로 얻어낸 자유투가 한자리 수 득점차를 만들어 낸다. 이어진 찬스에서 수비가 자리 잡기 전 다시 드라이브 인을 통한 골밑 득점으로 6점 차. 작전 타임 후 한 차례 공격을 막아 낸 뒤, 탑에서 스크린을 이용해 두 수비수 사이를 찢고 들어가 던진 중거리 슛이 깨끗이 성공한다. 1분 30초를 남기고 4점 차. 경기 종료 1분 전. 상대 수비의 타이밍을 뺏어 왼쪽 45도에서 3점 슛을 던진다. 깨끗하게 성공. 1분 사이에 9점을 몰아넣으며 경기를 박빙으로 몰고 간 선수는 한 팀에서만 20시즌을 뛰며, 누구보다도 승리를 원했고, 농구에 많은 열정을 코트 위에 쏟았던, 수많은 영광의 순간을 뒤로하고 커리어 마지막 경기를 가졌던 ‘Black Mamba’ 코비 브라이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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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조던’을 향한 길
90년대 등장한 스타들이 마이클 조던을 보며 NBA선수의 꿈을 키웠다면, 2000년대 등장한 스타들 중 코비를 보며 꿈을 키운 선수들이 많다. 후배 선수들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코비가 걸어온 길은 자신의 우상이었던 마이클 조던을 닮고, 그를 뛰어넘기 위한 과정이었다. 
1996년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은 고졸 드래프트로서 NBA에 데뷔한 코비는 13순위로 밀워키 벅스에 지명됐다. 그러나 고등학교 농구계를 ‘씹어먹던’ 실력을 눈여겨 본 당시 LA 레이커스의 제리 웨스트 단장의 눈에 뛰어 드래프트 지명 이후 곧바로 LA 레이커스로 트레이드 됐다. 함께 데뷔한 케빈 가넷과 고졸 드래프트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후 많은 선수들이 고졸의 신분으로 NBA에 데뷔하는 계기가 됐지만, 부족한 기본기로 인하여 NBA에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선수들이 많아졌고, NBA는 고졸 이후 1년 간의 기간을 의무적으로 두어 이를 제재하기에 이르렀다. 어쨌든 코비의 LA레이커스와의 20년 프랜차이즈 히스토리 시작의 순간이었다. 
데뷔 초기부터 코비의 캐릭터는 확실했다. 코비는 마치 득점만이 모든 것인 듯 농구를 했다. 코비는 데뷔 시즌 90년대 스타 중 한명인 에디 존슨의 백업으로 코트를 밟았지만, 멈추지 않는 도전정신으로 늘 코트에서 자신의 플레이를 펼쳤다. 
두 번째 시즌에서 더 많은 출전 시간과 전 시즌 대비 두 배 가까운 득점력을 선보인 코비를 두고 LA 레이커스는 에디 존슨을 트레이드 하여 기회를 주기 시작했다. 코비는 부여잡은 기회를 살리며 득점력을 올려갔고, 99-00시즌 처음으로 시즌 평균 20득점 이상을 기록했다. 
LA 레이커스에는 코비 말고도 NBA의 독보적인 ‘Most Dominat Ever’ 센터, 샤킬 오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비운의 스타 앤퍼니 하더웨이와 함께 동부에서 올랜도 매직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오닐은 코비와 손을 맞춰 팀을 이끌었다. 두 선수의 원투펀치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그 결과는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와 함께 3연속 챔피언 타이틀로 다가왔다. 00-01 시즌 플레이오프 무대에서는 ‘앤써’ 앨런 아이버슨의 필라델피아 식서스에게만 1패를 기록하며 우승을 하는 등 압도적 전력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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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와 오닐의 공존 문제는 팀 내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과도 같았다. 코트 위에서는 누구보다도 압도적인 존재였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 오닐은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 이후 기자회견에서 코비에 대해 묻자 “브라이언트가 누구냐”고 되물었다. 오닐은 “그 이름은 참 낯설다. 수많은 이름들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 이름은 잘 모르겠다”며 둘 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드러냈다. 
02-03시즌 ‘밀레니엄 왕조’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패한 LA 레이커스는 칼 말론, 게리 페이튼을 영입하면 ‘전당포(four)’ 시즌 1을 개막했다. 정규시즌 초반 예상외로 선수들 간 호흡이 맞지 않으며 우려를 표했지만 결국 파이널 무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래리 브라운 감독이 이끄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끈끈한 수비에 무릎꿇고 말았다. 파이널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LA 레이커스의 선수들은 우승을 하지 못하자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이는 코비가 프랜차이즈를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매김하는 순간이었다. 분명 코비로 인하여 오닐과 LA 레이커스의 이별이 아름답지 못한 면도 있었다. 3번의 우승을 차지하고, 선수로서 전성기를 향해 가던 코비에게 팀 내 1인자 자리는 뺏길 수 없는 자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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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불장군’의 비난 속 홀로서기
그러나 1인자 자리는 힘든 자리였다. LA 레이커스는 오닐이 떠난 다음 시즌인 04-05시즌 플레이오프 무대 진출 실패라는 결과를 안았다. 코비는 평균 27.6득점 6어시스트로 팀을 이끌었지만, 팀은 앞선 트레이드에서 사용한 드래프트권 소모로 리빌딩을 추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선수로서 전성기였기에 더욱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05-06시즌은 코비 개인으로서는 절정의 기량에 달했던 순간이었다. 시즌 평균 35.4득점, 야투율 45%를 기록한 코비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 상대는, 당시 ‘7 seconds or less’로 리그에 공격 농구 붐을 일으키며 서부지구 1위에 오른 스티브 내쉬의 피닉스였다. 압도적 기량 차이는 확실했다. 모두의 예상은 피닉스가 몇 경기 만에 끝내냐 였다. 그러나 코비는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았다. LA 레이커스는 첫 경기를 내준 후 내리 3경기를 따내며 피닉스를 탈락 위기에 까지 몰고 갔다. 4차전에서 보여준 2번의 버저비터는 코비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여전히 회상되고 있다. 
LA 레이커스는 드래프트를 통해 팀 전력을 보강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트레이드를 통해 대형 스타를 영입하면서 우승을 노리는 팀이다. 오닐이 떠난 후 세 시즌 동안 코비 홀로 이끄는 팀에 한계를 느낀 구단 측은 올스타급 선수들의 영입을 추진한다. 처음에 거론 된 것이 리그 최고의 포인트 가드로 거듭나던 크리스 폴이었다. 이 트레이드는 성사 직전까지 갔지만, 당시 뉴올리언스의 구단주 역할을 하던 NBA사무국이 리그 질서를 염려(?)하여 트레이드를 거부하며 무산됐다. 차선책을 찾던 LA 레이커스의 눈에 띈 스타는 우수한 기량에도 불구하고 팀 전력으로 인하여 번번히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탈락하던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파우 가솔이었다. 이 트레이드가 성사됐을 때도 앞서 크리스 폴의 경우만큼 논란이 일었다. 
가솔의 영입 효과는 즉시 증명됐다. 가솔 영입 첫해 NBA파이널 무대에 진출한 LA 레이커스는 클래식 라이벌 보스턴 셀틱스에게 6차전에서 패한다. 당시 보스턴도 케빈 가넷-폴 피어스-레이 앨런으로 이어지는, 게임에서나 이뤄질만한 라인업을 구축하며 우승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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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치부심한 코비와 LA 레이커스는 08-09시즌 서부지구 1위의 자격으로 플레이오프 무대에 진출해 드와이트 하워드가 이끄는 올랜도 매직을 가볍게 4승1패로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다음 시즌, 선수들의 부상으로 정규시즌 잠시 흔들거렸지만 또 다시 파이널 무대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이번 상대는 다시 보스턴 셀틱스. 두 팀은 7차전까지 가는 혈투를 벌였고, 코비는 이 무대를 통해 5번째 우승이자 커리어 마지막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2시즌 동안 LA 레이커스는 번번히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탈락하며 또 다시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 이번에도 대형 선수의 영입을 통해 전력 보강에 나섰다. ‘앙숙’ 피닉스의 스티브 내쉬와 올랜도 매직의 드와이트 하워드를 영입하면 ‘전당포’ 시즌 2를 열었다. 그러나 결과는 서부지구 라이벌 샌안토니오에게 무기력하게 당한 0-4 스윕이었다. 
이후 코비는 잦은 부상으로 결장하는 경기가 많아졌다. 13-14시즌은 단 6경기만을 출전하기도 했다. 데뷔이후 처음으로 기록한 30%대 야투율도 예전 같지 않음을 보여줬다. 은퇴를 결심하게 된 순간이다. 

Love or Hate.
스타들에 관해 논할 때 팬들의 방향이 일관되게 나올 수는 없다. 하지만 코비만큼 호불호가 갈리는 캐릭터도 드물다. 가장 말이 많은 부분은 ‘볼 소유욕’이다. 무리한 상황에서도 패스보다는 슛을 던지는 코비는 좋은 가십거리다. NBA선수들 중 승리를 원하지 않으며 슛을 던지는 선수는 없다. 그럼에도 코비는 유독 다른 선수들보다 그런 성향이 강해보였다. 
그러나 팬들에게는 이 또한 코비였다. 넘치는 승부욕과 농구에 대한 열정은, No.1으로서 자신이 해결하고자 하는 일종의 ‘ego’였다. 
‘Black Mamba’가 코비를 대표하는 별칭으로 불리지만, ‘Mr.81’이 오히려 코비를 더 잘 알려주는 별칭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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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되돌려보자. 2006년 1월 23일 토론토 랩터스와의 홈경기가 열리던 날이다. 코비가 홀로 팀을 이끌던 시절이다. LA 레이커스는 1쿼터에 이미 토론토에 36득점을 내주며 경기를 끌려갔다. 코비가 1쿼터에만 14득점을 올리며 추격하지만 힘들어보였다. LA 레이커스는 부족한 수비력에 2쿼터도 27득점을 내줬고, 코비의 12점을 제외하곤 단 8득점만을 올리면 전반을 63-49으로 이끌려갔다. 
팀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코비의 의지는 3쿼터부터 본격적으로 발동됐다. 코비는 3쿼터 15개의 슛 중 11개를 성공시키며 27득점을 올렸고, 4쿼터는 28득점을 올리며 시작부터 내내 끌려가던 경기를 기어이 역전시키며 팀에 승리를 안겼다. 이날 모든 스포츠 이슈는 코비의 ‘81득점’에 맞춰졌다. 윌트 채임벌린의 100득점에 이어 단일경기 득점 NBA 역대 2위 기록이다. 현대농구에서 나오기 힘든 기록이라 더욱 값져보였다. 
혹자는 코비의 이런 플레이에 NBA 스타에게 누구든 공을 몰아주면 충분히 그만큼의 득점을 올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기록을 만들기 위한 플레이가 아니었다. 팀의 전력이 나아지지 않은 가운데, 늘 패보다는 승리하는 경기가 많았고, 3번의 우승을 경험했던 코비에게 팀 전력이 맘에 들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경기에 대한 승리의 열망이 만들어낸 기록이었다. 그 열망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기록이었다. 
코비의 농구에 대한 의지를 나타내주는 일화는 또 있다. 새로운 스타로 등장하던 르브론 제임스가 우승을 위해 절친인 크리스 보쉬, 드웨인 웨이드와 뭉쳤던 마이애미 히트와의 원정 경기에서 패한 날, 코비는 경기에서 보여준 자신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다. 경기 후 모두가 떠났지만 코비는 원정 경기를 치른 그날, 원정 팀의 경기장을 빌려 자신이 납득할 때까지 슛 연습을 했다.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불어넣는 농구에 대한 욕심은 코비가 가지고 있는, 코비만의 아이덴티티다. 등번호를 8번에서 24번으로 바꾼 이유도, 24시간을 농구에 전념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도 일면 작용했다. 
코트 위에서 끊임없이 림을 향해 슛을 던지는 모습이 팬들의 맘에 들지 않을 수 있다. 데뷔 이후 꾸준히 코비 팬을 자처했던 필자도 그런 모습에 욕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코비를 여지껏 팬으로서 좋아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 슛에 담은 승리에 대한 의지, 갈망이 가장 코비다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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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이 아닌, 코비 브라이언트
1997년 12월18일 LA 레이커스와 시카고 불스의 경기는 ‘포스트 조던’으로 불리던 코비와 ‘진짜’ 마이클 조던이 만난 경기다. 이 경기에서 코비는 경기 내내 의욕을 앞세워 조던에게 도전했지만, 기록 외적으로 조던이 한수위임이 드러난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코비는 조던에게 ‘포스트업을 할 때 다리를 벌려야 하나요, 붙여야 하나요?’라 물었고 조던은 ‘다리를 통해 수비를 느끼고, 스핀을 할 방향을 정해라’며 한창 도전해오는 신인에게 조언을 해줬다. 
그렇게 조던을 동경하며 배우고 따라하던 신인 선수는 은퇴를 앞두고 마침내 우상을 따라잡았다. 
2014년 12월 14일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코비는 2쿼터 종료 5분24초를 남겨둔 시점에서 얻어낸 자유투를 성공시키며 NBA 통산 누적 득점 역대 3위로 올라서며 조던보다 한 단계 앞서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선수로서 꾸준함이 없다면 올릴 수 없는 기록이다. 
그리고 마지막을 앞둔 4월 13일 유타 재즈와의 경기. 
이날 경기도 LA 레이커스는 유타를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경기 내내 5점 차 이내로 좁히지 못하고 있었고, 선수들은 경기가 2분여 남은 시점에서 10점 차로 벌어지자 어느정도 경기를 포기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코비는 자신의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고자 했다. 드라이브 인에 이은 골밑 슛, 3점 등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하며 점수를 올렸다. 경기 종료 1분을 남기고 3점을 꽂으며 1점차 승부를 만든 코비는, 이어진 공격에서 중거리 슛을 성공시키며 역전 위닝 샷을 성공시켰다. 코비가 기록한 마지막 필드골이었다. 가장 마지막의 순간, 가장 자신의 플레이다운 슛으로 팀의 승리를 이끈 코비였다. ‘포스트 조던’이 아닌 ‘The Kobe Bryant’의 마지막다운 마무리였다. Mamba,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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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화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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